새 하늬 마 높
드로잉 기획전
05.26 - 07.08, 2023
새 하늬 마 높, 드로잉 기획전
May 26, 2023- July 8, 2023
MIUM PROJECT SPACE
서울시 종로구 평창20길 14, 1층
Tel. 02 3676 3333
<새 하늬 마 높>
드로잉은 장르다. 이미 장르다. 그저 밑그림이 아니다. 한낱 습작만도 아니다. 진작부터 ‘데상’은 더욱 아니다.
물에 그리든, 눈에 그리든, 모래에 그리든, 종이에 그리든, 천에 그리든 간에. 흑연을 쓰든, 숯을 문지르든, 콩테로 후비든, 먹으로 번져내든, 잉크를 찍어내든, 첨필로 파내든, 파스텔과 크레용을 칠하든, 붓으로 놀리든 간에. 상관없다. 모두 그림이다. 그림 그리는 연장이 그림이라는 본질을 바꾸지 못한다.
오래도록 이 작업을 한국에서는 ‘데상’이라고 불렀다. 프랑스 말 dessin 데셍을 그리 읽은 터다. 17세기까지 데생은 작품 의도와 계획을 뜻하는 ‘dessein’과 그닥 구분 없이 쓰였다. 영어로는 드로잉 drawing, 한자어로는 소묘素描다. 그리는 목적과 동기에 따라 ‘데상’은 여러 이름으로 불러왔다. 스케치, 크로키, 에스키스 esquisse, 에보시 ébauche, 에튜드etude 따위다.
고대사회에서 선으로 형태를 새기거나 목탄 따위로 형체를 나타내는 건 주술의 뜻과 힘을 지녔다. ‘그’와 닮았다는 건 실체에서 그림자를 베껴 가져오는 일이고 거기에 누군가 넋을 부여하면 신령스럽다. 그가 작가다.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그림, 조각, 건축 따위에서 프로토타입으로 이 방식은 널리 유행했다. 일본을 통해 수입된 ‘데상’은 선을 통해 명암 표현을 극히 중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정작 서구에서 선형을 중히 여기는 것과는 달랐다. 지난 백 여 년 동안 이 사고는 미술대학 입시를 통해 모든 미술 장르에 강제되었고 미술교육을 받은 한국인과 미술인은 여전히 이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에 따라 오래도록 드로잉은 적잖이 홀대 받아 왔다. 솜씨가 부족한 양, 표현이 미숙한 양, 깊이가 덜한 양, 하물며 ‘학생 그림’ 따위로 취급하기도 했다. 이제 통념을 버릴 때가 되었다. 드로잉은 ‘데상’을 넘어 명백한 장르다. 여기 모인 드로잉들이 말하고 있다.
작가 넷이 서로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 한 자리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거처하고 일하는 곳이 새 하늬 마 높이다.
이미정 작가는 새쪽에서 왔다. 그는 새 사람이다. 서울 동쪽에 산다는 뜻이다. 새벽이란 동쪽이 밝아지는 걸 말한다. 아침마다 동쪽은 새롭다. 그는 기성의 것들을 걷어내면서 경쾌하게 말한다. 나는 나일 뿐이라고. 그 ‘나’를 통해 보는 이는 ‘나’를 찾아가는 노정에 동행하게 된다.
하늬쪽에 있는 옛 공장터에서 작업하는 이는 고등어 작가다. 그는 지는 해에 연필 끝을 태워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그림 속을 찌르고 파고든다. 그의 드로잉은 순정의 분노를 품은 사회적 알레고리들로 세상과 자신을 탐구한다. 어떤 작품은 눈으로 보고, 어떤 작업은 눈에 묻히게 된다. 고등어의 드로잉은 그림을 떠나도 보는 이의 눈에 묻어난다.
허윤희는 마에서 왔다. 그가 남쪽 끝에 사는 까닭이다. 마는 남쪽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그의 목탄 드로잉은 거칠고 빠르게 나아가면서 서사를 이끌어낸다. 한 사람이 수면 위에 드러누워 있는 그의 바다는 끓고 있다. 물결은 분명히 검은데 푸른 파도 소리가 난다. 숨비소리 같은 숨소리도 들린다. 이는 결코 초벌 작업이 아니라 이것으로 완성태다.
높에서 온 작가가 있다. 그는 ㅁ을 기준으로 한참 북쪽에 거처한다. 부드러운 곡선 안에 쓰라린 열정을 잉태하는 표영실은 눈물 한 방울, 피 한 방울에서 우주를 본다. 무엇이든지 그의 손끝이 닿으면 부드러워진다. 그 안에서 고독이 신호처럼 점멸하고 있다. 그건 외로움은 아니다. 별 같고, 피 한 방울 같고, 세포 하나 같은 인자因子들이 떠돌다가 문득 발효하는 자리가 여기다.
새 하늬 마 높은 드로잉은 장르라고 웅변하고 있지 않지만 드로잉이 훌륭한 장르라는 걸 유감없이 입증하고 있다. 네 작가의 드로잉은 담백하다. 어떤 허위나 가식을 찾아볼 수 없다. 채색 없는 선들은 작가의 손길과 고민을 숨김없이 액면의 숨결로 드러낸다. 그래서 더 싱싱하다. 채색이 없다고 해서 상상의 색채가 없는 건 결코 아니다. 상상력은 모든 색을 품고 있고, 또 뿜어낸다. 오늘 그 색 이름이 새 하늬 마 높이다.
서마립(예술비평가)
<The Four Cardinal Directions>
Drawing is a genre. It's already a genre. It's not just a sketch. It's not just a doodle. It's not even just a 'dessin’.
It doesn't matter if you are drawing in water, snow, sand, paper, or fabric. It doesn't matter if you are using graphite, rubbing charcoal, smearing with Conté crayons, smearing with an ink stick, dipping in ink, digging with a stylus, applying pastels and crayons, or teasing with a brush. It's all drawing, and the tools used for drawing can't change the nature of the drawing.
For a long time, this practice was called “desang" ("데상”) in Korea, as it is from the French word “dessin”. Until the 17th century, dessin was used indistinguishably from “dessein”, which refers to the intention for and plan of a work of art. In English, it's “drawing”, and in Chinese, it's 小描素描. Depending on the purpose and motivation of the drawing, dessin went by many names, such as sketch, croquis, esquisse, ébauche, étude, etc.
In ancient societies, engraving a shape with lines or representing a form with charcoal had the meaning and power of sorcery because it is to copy a shadow from the real thing, and when someone attaches a spirit to it, it becomes numinous. That is what an artist does. Throughout the Renaissance, this method was widely practiced as a prototype in painting, sculpture, and architecture. “Dessin”, imported from Japan, tended to emphasize contrast through lines. It was different to the linearity emphasized in the West. Over the past century, this thinking has been imposed on all art genres through art school entrance exams, and art-educated Koreans and artists are still not free from this compulsion.
As a result, drawing has been looked down upon for a long time. It was often dismissed as unskilled, unexpressive, lacking in depth, or even as 'student drawings'. It's time to break this social convention. Drawing is a distinct genre, beyond 'dessin'. The drawings here speak for themselves.
Four artists, who worked in different places, have come together in one place. The Four Cardinal Directions are where they live and work.
Mijung Lee is from the east side “새(Sae)”(meaning both ‘new’ and ‘east’). She is a new person. It means she lives in the east of Seoul. Dawn means the brightening of the east. Every morning, the east is new. She strips away the old and says lightheartedly, "I am just ‘me’. I am only ‘me’, and through that ‘me’, the viewer is invited to accompany me on my journey to find myself.”
The artist working in the old factory site on the West side “하늬(Hanui)” is Mackerel Safranski. She burns the tip of her pencil in the setting sun, and rather than drawing, she stabs and digs into the picture. Her drawings explore the world and herself with social allegories of pure anger. Some are meant to be seen, others are meant to be buried. Mackerel's drawings remain in the viewer's eyes even after leaving the painting.
Yun-hee Huh is from the South side “마(Ma)”. That's why she lives at the southern tip. “마(Ma)” is the Korean word for south. Her charcoal drawings are wild and fast-paced, driving the narrative forward. Her sea is boiling, with a man lying on the surface. The water is clearly black, but there is the sound of blue waves. There's also the sound of breathing, like rain. This is by no means a rough draft, but a finished product.
The Four Cardinal Directions say that drawings are not eloquent as a genre, but they fully prove that drawing is a great genre. Their drawings are straightforward. There's no pretense or falsification. The uncolored lines reveal the artist's handiwork and worries as a breath of face value with nothing hidden, which makes it all the more refreshing. The absence of color does not mean the absence of imaginative color. Imagination holds and emits all colors. Today, the name of the color is The Four Cardinal Directions.
Marip Suh(Art Critic)